한 청년이
그곳에서 죽었다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스물한 살 박종철은 동료의 이름을 끝까지 밝히지 않았다. 그의 죽음으로부터 6·29 선언까지, 사업회가 보존해 온 26개 일자 사건일지를 그대로 옮깁니다.
1987년 당시 사건일지
사업회 보존 사건일지판 원본의 모든 일자를 텍스트로 옮긴 것입니다. 강조 표시 항목은 결정적 분수령에 해당합니다.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 관련 문용식 등 26명 구속됨. 이후 수배자 박종운의 소재 파악이 경찰의 핵심 과제가 됨.
자정을 넘긴 시각에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 관련 수배자 박종운의 소재 파악을 위해 박종철 열사를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해 감.
오전 11시 20분경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수사 2단에서 취조 중 사망. 박종철은 마지막까지 수배 중인 선배의 소재를 밝히지 않음.
치안본부에서 단순 쇼크사로 발표 — "탁 하고 책상을 치니 억 하고 죽었다".
최종 검안의사인 중앙대 부속병원 오인상 내과의사가 "오른쪽 폐에 탁구공만 한 크기의 출혈반과 목과 가슴 등에 피멍이 있었다" 고 증언.
치안본부에서 물고문 사실을 인정하고 조한경 경위·강진규 경사를 「특정범죄 가중처벌법 위반」 혐의로 구속.
전국 17개 대학 교내에서 각각 박종철 열사 추모제를 치르고 거리로 진출, 격렬히 시위함.
2월 7일 명동성당에서 열릴 「박종철군 범국민 추도식」 을 불법으로 규정. 경찰병력 7천여 명을 동원해 원천봉쇄 시도.
경찰과 학생 충돌. 전국에서 시위가 이어지고 798명이 연행되어 34명 구속.
「박종철군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 이 경찰의 원천봉쇄로 저지되고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시위 전개. 439명 연행.
시국 관련 수배자 108명에 대한 검거령 발표. 1만여 명의 경찰병력을 동원해 대학가 주변 등 일제 검문검색 실시.
전두환이 특별담화로 「개헌논의 유보」 발표 — 이른바 4·13 호헌조치.
4·13 호헌조치를 비난하는 전국 각지의 시국성명이 잇따라 발표.
「5·18 광주항쟁 희생자 추모미사」 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명의로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군의 고문치사사건이 조작되었음을 폭로.
검찰이 은폐조작을 시인하고 고문수사에 가담한 경관이 모두 5명임을 밝히고 3명 추가 구속.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 치안감, 대공수사 3단 5과 2계장 박원택 경정 등 관련 모임에서 범인 축소·조작 모의 사실이 드러남.
6월 10일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범국민대회」 를 갖기로 결정.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발대식을 거행하고 4·13 조치 철회와 직선제 개헌 공동쟁취 노선 천명.
경찰은 병력 6만 명을 동원해 「6·10 박종철 범국민대회」 대회장소인 성공회를 원천봉쇄. 이에 항의하는 학교 앞 시위 중 연세대 이한열 군이 최루탄을 머리에 직접 맞아 중태에 빠짐.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주최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 가 경찰의 원천봉쇄에도 불구하고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 이날 전두환은 노태우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
서울·부산·대전·광주 등 전국 대도시에서 범국민대회 거리시위 지속.
명동성당 주변에서 「살인적 최루탄 난사」 에 대한 범국민 규탄대회를 개최.
명동성당에서 「나라와 민주화를 위한 특별미사」 를 거행하고 촛불 가두행진을 전개.
6월 18일을 「최루탄 추방의 날」 로 결정하고 행동지침 발표. 전국 각지의 거리시위 및 집회가 계속.
「최루탄 추방 국민대회」 장소인 연동교회가 원천봉쇄되고 시내 곳곳에서 대규모 거리시위 전개.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이 직선제 개헌·김대중 사면복권 등 8개항 시국수습을 위한 선언 발표 — 이른바 6·29 선언.
남은 자들의 기억
그 날의 진상을 밝힌 양심 증언자(부검의 황적준·검안의 오인상 등)·취재 기자·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유족의 증언과 자료를 사업회가 점진 모으고 있습니다. 관련 자료·증언이 있으시면 시민의 자료 기증으로 함께 잇습니다.
자료·증언 기증하기※ 자극적 묘사는 의도적으로 절제했습니다. 본 페이지의 내용은 공식 자료·증언·사업회 보존 사건일지에 기반합니다.
